카자흐스탄 국민 아티스트, 극장 및 영화 배우
1915~77년, 출생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시
그의 한국 이름은 이장성입니다. 이장성 배우는 그 당시 소련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성장의 모든 단계를 거쳤습니다. 초등학교의 소베트 단체, 중학교의 소년 단체, 고등학교의 청년 단체와 공산당 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극장에서도 그는 보조 무대 제작 전문가가, 무대 제작 전문가, 드라마 및 팝 아티스트, 명예 아티스트와 국민 아티스트까지 모든 단계를 걸쳐 승진했습니다.
15세 때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버지를 잃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빨간 깃발’ 인쇄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무전문 공연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에 그는 한인극장에 입성했습니다. 이배우가 맡은 첫 역은 연극 ‘동해안 빨치산들’의 빨치산이었습니다. 전체 공연 동안 그는 단지 20 단어만 말했지만 전문가들은 그에게서 유능하고 유망한 예술가를 보았습니다.
그가 맡은 모든 역은 특징적이었고 관객들이 기억한 것이었습니다. 농담을 잘하고 조커 방자 (‘춘향전’연극, 연성영 저자), 사악 놀부 (‘흥부와 놀부’ 연극, 태장춘 저자), 이아고 (‘오델로’극,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자), 바이 (‘카라쿰의 비극’ 연극, O. 보디코프 저자) 등입니다.
이장성 배우의 연기 기술의 정점은 N. 보고딘 저자의 연극 ‘크렘린 차임스’에서 레닌의 역이었습니다. 레닌의 이미지를 더욱 잘 습득하기 위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일부러 모스크바로 가서 크렘린에 있는 레닌이 쓴 사무실 겸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레닌 역을 맡은 유명한 배우 A. 스미르노프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는 ‘크렘린 차임스’의 ‘한인’ 레닌이 모스크바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극장에서 팝 및 콘서트 앙상블의 솔리스트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이배우는 차이콥스키 명칭 국립 음악대학에서 카자흐스탄 가수들을 위해 특별히 설립한 코스에서 연수를 받았습니다. 모스크바에 2차 대전을 맞이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당시 국민 민병대에 속해 모스크바 방어에 참여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연수를 수료한 후 이장성은 고려극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관객들은 특히 그가 앙코르로 받은 노래 ‘나의 모스크바’, ‘카콥카’, ‘사랑하는 도시’ 및 이명상 작곡가의 한국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민 이티스트 이장성은 계획한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77년 야쿠티아 출장 중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심장이 갑자기 멈췄습니다.